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1. 2. 11:50

3년 쯤 전인 것 같습니다.

아직 기자였던 권백수가 초봄이 막 몰려오던 생각만해도 울렁거리는 5월 날.

구로공단 골목 한 콘테이너 안에서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빼빼 마른 얼굴에 짝짝 갈라진 입술, 빡빡 깎은 머리털 사이에는 허연 모근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3달 여를 굶어 간간히 목에서 쇳소리가 나지만, 질문 던지는 것조차 미안스러워 말을 못잇던 기자에게 농을 던져주던.


김소연 기륭전자 노조 분회장이었습니다.


동생같은 용역 깡패에게 맞아도 보고, 사선을 넘나드는 단식도 해보고, 여자로선 엄두도 안날 삭발까지 단행하면서, 그가 6년이 넘게 요구했던 ‘직접 고용’이,


드디어 됐다고 합니다.

어저께말입니다. 

                            김소연 기륭전자 노조 분회장.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공장에 들어와

10여년 넘게 ‘공장밥’ 좀 먹었다 싶었지만

떼려야 뗄 수 없었던 그 지긋지긋한 ‘비정규직’이라는 꼬리표를 마침내 떼게 된 것이죠.

나이 마흔 하나에 말입니다.


그와 함께 싸웠던 200명의 노조가 지난 6년 동안 하나 둘씩 떠나 이제는 10명만이 남았다고 합니다.


3년 전 인터뷰 당시에도 ‘떠난 이’에 대한 섭섭함 보다는

다시 비정규직, 다시 용역의 짐을 짊어질 수밖에 없는 떠난 동지를 걱정하던 그였는데

어젠, 그 떠난 동지들을 떠올리며 ‘미안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만’ 직접고용이 되서 미안하다고. 


오늘 아침,

이 기쁜 소식을 접하고 관련 기사를 읽는 동안

그 알싸한 날에 만났던 까까머리 김소연 분회장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살다보니, 이렇게 기쁜 소식도 있나봅니다.

김 분회장이 흘린 눈물은 지난 6년치로도 충분했겠지요?


처녀 적 공장에 들어와

난생 처음 팔뚝질이라는 것도 해보고 ‘동지’라는 말도 배워가던

스물 몇 살 언니가 지금은 애기 엄마가 되었다죠? 그 분 잘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6년동안 

그 누구도 상상할 수도, 버텨내기 힘들었을 힘든 투쟁을 마무리한 기륭전자 노조원 여러분께 축하와 존경의 박수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이 들리는 와중에도 구미에서 싸우고 계시는 KEC 노조원 여러분의 무사귀환을 간절히 바랍니다.

또 경찰 연행에 항의해 분신, 지금 한강성심병원에서 치료중인 김준일 지부장님의 쾌차를 바랍니다.


비정규직의 눈물이 멈추는 평등한 세상, 살기좋은 세상은

이렇듯, 배고픈 자가 6년 동안 굶고 맞고 몸에 불에 지르고 죽기 살기로 싸워야 만들 수 있는 걸까요?